[창간 10주년 기념특집 II] 한국 프레이트 포워더, 50年 역사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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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7.10 10:06   수정 : 2015.07.10 10:06
6-70년대 선사-항공사 일부 업무에서 독립 시작
8-90년대 성장과 격동 시기 거쳐 2000년대 이후 과도 및 정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역사를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지양해야겠지만 잊는다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본 지는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대한민국 프레이트 포워더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역사를 이번 호에서 훑어본다. - 편집부

포워딩의 역사는 운송의 역사

포워딩의 역사를 명확하게 구문하기는 어렵지만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생기는 화물수송의 발달이 포워딩의 역사임에는 틀림없다.

운송의 발달은 그 시대의 상공업의 성장 발전과 전쟁 기타 민족의 이동 등 사회나 조직, 국가 등이 발전 변천하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의 하나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인구의 증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끈임 없이 다양하게 발전되어 온 운송발달의 역사이다.

인간은 해변이나 강변에 부락을 형성해 삶을 영위하면서 물물교환을 시작했고, 바로 그곳을 교역발전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상교역과 운송이 시작된 장소는 해변의 항구 또는 강가였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교역 및 운송 등은 항해술의 발전과 함께 점차 확산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물량유통이 많아짐에 따라 화물보관을 위한 창고 건립의 필요성이 생겼고 내륙까지의 수요 및 공급을 충족시키기 위해 운송이 연장되면서 발달되었다.

유럽은 10세기부터 존재

기록에 의하면 유럽의 포워더는 10세기경부터 존재해왔다. 이 포워더들은 항만 및 내륙도시에 공유창고를 설치해 대량화물을 보관 및 보관의 역할을 했다. 이런 내륙 창고의 존재는 해운 교역을 수요를 늘려 해운교역을 신장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초창기 포워더의 위치는 생산업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여 영업 활동을 하는 상인 노릇을 했는가 하면 수출입상 노릇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수송 전문지식을 직접 효율적으로 이용해 자금축척을 하였으며, 화물의 선적, 하역, 통관, 보관, 판매 등 일체의 부대사업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경비도 자체자금으로 실화주를 대신해 결재해 주었기 때문에 선주나 실화주도 안심하고 포워더를 이용했을 것이다.

한국 포워더의 시작

우리나라 프레이트 포워더가 생기기 시작한 때는 고도경제성장기를 맞이한 1970년대 초로 선박대리점들이 외국 포워더의 한국 에이전트 역할을 맡아 포워딩 서비스를 하다가 그 후 선박대리점에서 취급하던 포워딩 업무가 하나 둘씩 별도의 독립 법인체로 분리되면서 포워딩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세부적으로 보면 당시 비록 정식 면허는 아니었으나 (주)동방운수창고가 1973년 국제영업부를 개설하면서부터 한국포워더의 기원이 되었다. 반면에 국내최초의 해상콘솔업체는 (주)기륭통상을 꼽을 수 있다.

그 당시에 이미 유럽계 포워더 버카트(Birkat)와 프락트(Pracht)가 국내에 지사를 설립해 진출해 있었다. 국내최초의 외국계 진출 포워더는 독일의 프락트(Pracht). 이 회사는 연락사무소 형태로 시작됐다. 프락트 그룹은 현재까지 대형화물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 세계에서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점차 물량이 늘어나면서 해운항만청은 포워딩산업의 정상적인 발전 및 업계의 질서유지를 위해 해상운송사업법에 근거해 ‘외항해상운송 부대사업 면허요령’을 재정했으며, 1976년 10월 30일 26개 업체에 대해 면허를 발급했다. 이른바 본격적인 포워더(NVOCC)의 역할이 시작됐다. 이 때 받았던 26개 업체 중에 현재 9개 업체가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979년 말까지 약 50여개의 업체가 정부로부터 해상운송 주선업 면허를 취득했다.

당시 서비스를 진행한 포워더는 대부분 콘솔리데이터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기업은 실제 화주영업을 진행하기 보다는 해외 파트너의 노미네이션 카고를 취급했으며, 일부 포워더들은 현재의 LCL 콘솔리데이터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포워더에 근무하던 업계 관계자는 “당시엔 포워더 B/L은 은행에서 받아주질 않아 선사 B/L로 바꿔서 은행에 제출하는 일도 있었다”며 당시 포워더의 현실을 회상했다.

70년대에는 주요 수입 물품은 생산을 위한 자재들로 설탕, 옥수수, 밀, 광공업 원료 등 이 주류를 이루었다. 수출 물품은 일반 생활용품이 많았다.

항공화물의 경우, 해상보다 그 유래는 더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항공화물대리점이었던 한국항공화물이 1961년, 서울항공화물이 64년, 세방익스프레스가 65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이들 업체들을 중심으로 1969년 11월 (가칭)대한항공화물주선업협회가 창립되어 1970년 11월 한국항공화물대리점협회가 교통부로부터 인가 받았다.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왔는데 이런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시절,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맞물리기도 한다.

80년대, 본격적인 포워더 인식 확장

80년대에 들어서자 수출업자와 해운선사들의 해상운송주선업에 대한 인식도가 높아져 갔다.

당시 한국해상운송주선업협회에 따르면 80년 10월말 기준으로 국내에는 50개 포워딩사들이 주선한 수출입 컨테이너물동량은 TEU 기준 총 8만1,364개로 79년 10월 5만8,244개보다 39.6%가 증가하는 등 상승세를 보였다. 또한 취급수수료 수입도 늘어나 79년보다 52.8%가 늘어난 1,252만5천달러를 기록했다. 당시 포워딩사들의 실적 상승세는 포워더 B/L로 수출입화주들의 자금회전이 빨라졌고 화주 서비스가 지속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승세는 이어져 1983년도 기준으로 해상운송주선업체는 78개 업체로 늘어났다.

이후 1984년 1월 1일부로 시행되는 미국 신해운법에 따라 1983년 12월 31일 해상운송사업법이 해운법으로 대체되었고 해상운송주선업도 면허제에서 등록제로 바뀌게 되었다.

1982년 발생한 오일쇼크로 인해 전세계 경기가 어려움에 빠지면서 한국 포워딩 업계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또한 훈련된 인재의 부족과 일부 업체들의 영세성으로 인한 경영 부실로 화주와 운송업자들로부터 편견과 불신을 받던 시기였다.

또한 포워더 업의 진출 문턱이 낮아지면서 포워더에 기초지식 없이 단순히 면허만 있으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포워딩 업계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결과 경험축척의 부족과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대외 신용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빈번했던 시기였다.

1988년 들어 우루과이 라운드에 의해 해상운송업계가 개방되면서 본격적인 외국계 기업들의 국내 진출이 시작됐다. 이에 정부는 국내시장 보호를 위한 방안으로 포워더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했다. 또한 자유경쟁에 맞춰 신규 등록 시 해무사 제도를 도입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해무사 라이센스 습득이 필수 아닌 필수가 됐다.

당시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로 일본에서 물류라는 단어가 들어와 이때부터 물류를 사용하게 된다.

순탄치 못했던 항공화물대리점 업계

80년대 들어 당시 한국항공화물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홍순두(전두환 대통령 동서)씨를 중심으로 한 로비로 인해 신규대리점 면허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76년부터 항공화물 운송대리점 면허의 신규허가를 일체 불허해 왔다. 하지만 84년 중반부터 면허자체가 이권화에 대한 우려 및 몇 년 동안 항공화물 수요도 크게 늘어 항공화물 운송대리점의 면허의 개방이 불가피한 분위기에 이르렀다. 실제 77년부터 84년까지 항공화물수요는 매년 평균 10% 이상 신장해 왔다.

당시 교통부는 면허개방방침에 방향을 잡고 완전개방방안과 한정개방방안을 검토해왔으나 완전 개방하는 경우 업체난립으로 인한 시장질서문란 등의 부작용을 우려해 항공화물수요에 비례한 한정개방방안을 확정했고 85년 교통부는 76년부터 억제해오던 항공화물운송대리점의 신규면허를 허용키로 했다.

당시 154개 희망 업체 중 추첨을 통해. 서중상사, 호성공영, 남아항공화물, 매일항운, 화천개발주식회사, 한생익스프레스가 취득했다. 이후 2자 물류업체로 현재 현대로지스틱의 전신인 우신국제운송, 범한판토스의 전신인 범한종합물류 등이 진출하게 됐다.

그러나 한정개방에 따라 조건은 변경되어 당시 항공화물운송대리점의 자격요건은 자본금 5,000만원, 창고 30평, 에어카고 운반차량 3대이상 보유에 항공계통 3년이상 근무경력자 고용 등이었다.

이와 관련 한 관계자는 “당시 항공화물대리점 허가 조건이 신규 준비 업체들에게는 높은 편이었다. 따라서 많은 업체들이 본의 아니게 창고 부지 공증 및 은퇴자 등기 임원 등의 다양한 우회 경로를 통해 조건을 만족시켜 진출할 수 있었다” 고 회고했다. 또한 이런 상황으로 당시 무면허 업체도 많이 등장했는데 이를 발견 시 고발하는 역할을 당시 협회가 맡았다고 말했다.  

한편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초반 기간에는 항공화물대리점 업체들이 해운사업부를 신설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 해운포워더 쪽 인력이 항공화물업계로 대거 이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때 이동한 이동한 해운 분야 인력들은 대부분 상호간의 기준 및 색깔 차이 등을 이유로 다시 해운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복합운송주선제도 통한 일원화 성공....양 협회 통합

80년대를 지나오며 수출입 화물을 취급하는 운송주선업이 정부 및 업종 간에 얽혀있는 이해관계로 인해 해운법의 해상화물운송주선업과 항공법의 항공운송 주선업으로 이원화 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1년 12월 14일 복합운송이 이루어지는 시대적 요청과 현재의 구분이 맞지 않는다는 의견에 따라 복합운송주선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당시에는 복합운송주선업, 항공운송수선업, 해상화물운송주선업 등이 공존하였다.

1991년 화물유통촉진법이 제정되었지만 단순 업종 전환에 불과했다. 그러나 복합운송주선업체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교통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발족한 한국복합운송주선업협회(현재 국제물류주선업협회)가 1993년 국제복합운송주선업협회(FIATA)의 회원으로 등록돼 해상운송주선업체와 마찬가지로 복합운송주선업체들도 정식으로 FIATA B/L을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기존의 해상화물운송주선업체들 복합운송 주선업으로 등록해 신규업체의 진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3년 12월 27일 항공운송주선업을 폐지했고, 이어 1995년 12월 해상화물운송주선업을 삭제함에 따라 복합운송주선업으로 일원화 되었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한국 해상운송주선업협회와 한국항공화물협회의 협회간 통합 진통도 존재했다. 당시 이런 시도는 현재 한국국제물류협회의 태동으로 시작됐다. 96년 당시 매체 및 업계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한지붕 두가족의 분란을 겪으며 협회는 자리 매김했다.

또 다른 실질적 전성기 다가와...다방면 체질 개선 시기

1996년에는 외국인투자법인 제한법이 풀리면서 복합운송주선업 시장이 개방돼 세계적으로 유수한 외국계 포워더 업체가 국내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선진화된 경영기법과 막대한 자본력 그리고 세계적인 명성과 전 세계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이용해 국내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며 한국 물류시장의 점유율을 높였다.

90년대에 들어서는 관련 법규의 정비를 통해 라이센스 및 업계 개방성이 구축되면서 업무적 완성도가 올라간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관계자들도 많았다. 또한 항공화물 운임의 경우, 달러에서 원화로 바뀌면서 운임체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바 있다.

9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많은 콘솔포워더의 탄생과 활약도 이어진다.

당시 업계에 입문했던 한 임원은 포워더의 전성기는 90년대 중반부터 2005년 전후 사이 정도로 본다고 말하며 급격히 팽창했던 시대를 회고했다. 그는 당시에는 콘솔을 짜는 것만으로 대단해 보이는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 당시 운임과 지금 운임이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하며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 다른 임원은 당시에는 성장세가 너무 높아서 영원 사업들의 파워가 엄청났으며 심지어 가르쳐 주는 사수가 없는 신입 사원 조차도 좋은 실적을 낼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고 기억했다. 이어 그는 이 시절을 지나 2000년대에 설립된 업체들의 체질은 90년대 설립 업체들과 체질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90년대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바로 IMF. INF는 당시 많은 포워더들의 체질강화에 약이자 독이 되었다. 당시 실무자였던 한 임원은 시기에 아웃바운드 업체들은 수출 및 환율로 인해 엄청난 성장세를 누렸지만 인바운드 중심이던 업체들은 그야말로 폭탄을 맞았다고 기억한다. 또 다른 관계자도 당시 이런 변화를 준비한 업체들은 살아남아 성장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업체들은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이 시기에는 많은 중견 포워더들의 몰락이 진행됐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대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부적인 요인도 적지 않았다. 주로 방만한 경영, 타업종 투자 등이 몰락의 배경으로 꼽힌다. 이 때 사라진 업체는 대표적으로 삼정해운, 세주해상, 보닉스쉬핑, 드래곤해운, 기륭통상 등이다.

무한 경쟁의 시대로

2000년대를 맞아 포워더 업계는 양적팽창을 맞게 된다. 포워더는 3,000개사를 돌파했고 포워더 등록의 시 도 위관도 진행됐다.

또한 그 동안 업계를 이끌어 오던 세대 교체도 진행됐다. 이런 교체에는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당시 회사를 나와 차리던 40~50대 사장들이 경영 악화 등의 요인으로 업계를 떠나는 경우였다. 또 다른 하나는 주로 항공업계 분야의 은퇴를 앞둔 60대 사장들이 회사를 매각하고 지분을 팔면서 자연스러운 교체가 이뤄졌다.

특히 이 매각 시에 외국법인들의 현지 법인 진출과 맞물려 이들 법인들을 해외업체가 매입하면서 자연스러운 시장 변경도 진행됐다. 이후 현재까지 시장은 무한경쟁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 2007년 8월 화물유통촉진법을 폐지하고 물류정책기본법으로 개정하면서 복합운송주선업 대신 국제물류주선업으로 대체 되었다.

이에 덧붙여 한국 경제의 악화로 인한 관련 선사들의 조기 퇴직은 진입 장벽이 낮은 프레이트 포워더의 창업과 참여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이로 인해 전문 인력의 부족으로 인한 과당 스카우트와 인건비 상승을 가져 왔다.

물류부분에 있어서 일정부분 배정된 프레이트 포워더의 물동량 몫은 분사되고 일부 포워더는 원가이하의 조건까지 제시하는 출혈 영업이 전개되며 경쟁이 가열화 되면서 포워딩 업계의 경영 악화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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